posted: 23-Jul-2026 & updated: 23-Jul-2026

부제 - 실리콘밸리 현장에서 목격한 대한민국 AI의 달라진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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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저녁, 샌프란시스코의 한 행사장. 엔비디아의 젠슨 황, 오픈AI의 샘 올트먼, 앤트로픽의 다리오 아모데이, 그리고 이재명 대통령과 우리 기업 총수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AI 패권 경쟁의 심장부에서 한국이 비전을 선언하고, 세계가 경청했다. 필자는 스탠포드에서 전자공학 박사를 마친 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서 반도체를, 아마존에서 전자상거래와 AI를 경험했고, 한국과 실리콘밸리를 오가며 스타트업도 창업했다. 빅테크와 대기업, 스타트업, 칩과 모델 등 두 나라 현장을 넘나들며 반도체 공급망과 AI가 실제 산업에 적용되는 현장을 함께 바라볼 기회를 가졌다. 지금도 혁신의 최전선인 실리콘밸리에서 AI와 바이오 산업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지만, 이날의 장면은 여전히 낯설면서도 뭉클했다. 이런 자리는 성사 자체가 메시지다. 가장 바쁜 사람들이 한국이 마련한 자리에 모인 건 외교적 예우가 아니다. 한국이 HBM(고대역폭메모리) 공급국을 넘어, AI가 현실 산업으로 구현되는 대규모 현장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한국은 메모리 가격을 얘기할 때 등장하는 ‘훌륭한 공급자’였다. 그런데 공기가 달라졌다. 요즘 저녁 자리에서는 ‘누가 더 좋은 모델을 만드느냐’만큼이나 “메모리가 병목이고 전력이 모자란다”는 얘기가 화두다. 추론의 시대에 병목이 연산에서 메모리·에너지로 옮겨 온 것이다. 그 병목의 열쇠를 쥔 나라가 한국이며, 이 열쇠는 우리 기업들이 수십 년 축적으로 벼려 낸 성취다. 한국은 이제 공급망 조연이 아니라 AI 혁명의 속도를 결정하는 변수다. 남은 과제는 이 우위를 국가의 지속적 경쟁력으로 바꾸는 일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과감한 투자가 이어지고 그 곁에서 스타트업이 자라나도록, 정부가 전력망·인허가·인재의 토양을 다져 줘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다음 승부처다. 챗GPT가 연 첫 막이 ‘말하는 AI’였다면, 실리콘밸리의 관심은 이미 제조 현장과 로봇으로 들어가는 피지컬 AI, 곧 ‘일하는 AI’로 옮겨 가고 있다. 그런데 이 승부는 최고의 모델을 넘어, 그것을 훈련하고 검증할 현실의 제조 현장을 얼마나 갖췄느냐에서 갈린다. 자동차·조선·배터리·로봇을 아우르는 한국의 밀집된 제조 생태계는 세계가 쉽게 복제할 수 없는 거대한 학습장이다. 정부가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과 컴퓨팅 인프라로 ‘AI 3대 강국’의 기반을 다졌다면, 다음은 그 역량을 이 현장에 연결해 성과로 바꾸는 일이다.

바이오 AI에서는 잠재력이 더 극적이다. 임상에 들어간 신약 후보의 열에 아홉은 실패하는데, 순수 AI로 이 실패율을 낮추려던 미국과 유럽조차 아직 뚜렷한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어느 나라도 결승선을 넘지 못한 경주다. 여기서 한국은 남다른 조건을 지녔다. 전 국민 건강보험이 표준화해 축적한 데이터, 건강검진이 일상으로 자리 잡은 덕에 건강한 사람들의 ‘정상 데이터’까지 국가 단위로 쌓인 나라는 드물다. 무엇이 건강한 상태인지 AI가 배우려면 바로 이런 데이터가 있어야 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바이오 의약품 생산 능력에 이 데이터가 더해지면 ‘신약 발굴 엔진’의 마지막 조각이 채워진다.

역설적이게도 실리콘밸리가 가장 자신 없어 하는 질문은 기술이 아니라, 그 혜택을 사회가 고루 누리게 하는 방법이다. AI가 만들 거대한 변화를 어떻게 모두의 기회로 바꿀 것인가. 이곳 어느 천재도 아직 답하지 못했다. AI를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의 AI’로 만들겠다는 우리 정부의 방향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한국식 답의 출발점이다. 전국 단위 제도를 신속히 확산시켜 온 실행 역량을 가진 한국은 그 실험에 유리하다. 관건은 AI라는 기술의 열매가 교육과 의료, 공공서비스 구석구석까지 흘러가게 설계하는 일이다.

선언은 시작일 뿐이다. 자본의 깊이, 심사의 전문성,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도 숙제로 남는다. 다행히 그 연결은 이미 시작됐다. 실리콘밸리의 한인 전문가들이 한국의 기업·연구기관·정부와 교류하며 통로를 만들어 왔고, 이번 서밋은 여기에 정부의 무게를 더했다. 이제 남은 것은 정부의 꾸준한 관심 속에 이곳의 뜨거운 의지가 실제 변화로 이어지도록 오래 밀고 나가는 일이다.

행사장을 나서며 생각했다. 한국은 더 이상 초대받은 손님이 아니라 무대를 함께 만드는 파트너이며, 그 무대에서 대체 불가능한 자리를 확보해 가고 있다. 함께 만드는 혁명의 첫 문장이 그날 샌프란시스코에서 쓰였다. 다음 문장은 우리 모두의 몫이며, 나 역시 이곳 현장에서 AI와 사람과 생태계를 잇는 한 줄을 보태려 한다.

필자 소개

윤성희 - 에루디오바이오 공동창업자 겸 CTO이자 에루디오바이오코리아 공동창업자 겸 대표. 서울대 전기공학부를 졸업하고 스탠포드대에서 전자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삼성전자, 아마존을 거쳐 SK하이닉스 부사장, 가우스랩스 공동창업자 겸 글로벌 R&D 총괄을 지냈으며, 현재 실리콘밸리 비영리 AI 커뮤니티 “실리콘밸리 AI 넥서스” 의장을 맡고 있으며, 서강대 방문교수와 DGIST 자문교수를 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