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22-Jul-2026 & updated: 22-Jul-2026

부제 - 실리콘밸리 현장에서 목격한 대한민국 AI의 달라진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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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저녁, 샌프란시스코의 한 행사장. 엔비디아의 젠슨 황, 오픈AI의 샘 올트먼, 앤트로픽의 다리오 아모데이, 그리고 이재명 대통령과 우리 기업 총수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세계 AI 패권 경쟁의 심장부에서 한국 정부가 비전을 선언하고, 세계 AI를 이끄는 리더들이 경청했다. 스탠포드에서 박사를 마친 뒤 삼성전자와 아마존, SK하이닉스를 거쳐 지금 실리콘밸리에서 AI-Biotech 스타트업과 비영리 AI 커뮤니티를 이끌고 있는 나에게도 낯설고, 솔직히 뭉클한 장면이었다. 이런 자리는 성사되는 것 자체가 메시지다. 지난해 가을 경주에서 GPU 26만 장 동맹으로 시작된 흐름이 태평양을 건너 실리콘밸리 한복판까지 이어졌고, 세계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이 한국이 마련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그들이 모인 이유를 단순한 외교적 예우로만 볼 수는 없다. 한국은 HBM(고대역폭메모리)을 공급하는 나라일 뿐 아니라, 반도체·자동차·조선·배터리·로봇 등 AI가 현실 산업으로 구현되는 대규모 현장이자 투자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한국은 ‘훌륭한 공급자’였다. 이곳 사람들의 대화에 한국이 등장하는 순간은 대개 HBM과 메모리 가격을 얘기할 때였다. 그런데 지난 몇 년 사이 공기가 달라졌다. 요즘 실리콘밸리 저녁 자리에서는 ‘누가 더 크고 성능 좋은 모델을 만드느냐’만큼이나 “메모리가 병목이고 전력이 모자란다”는 얘기가 화두다. 거대 모델이 실제 서비스로 배포되는 추론의 시대에 접어들며, 연산 못지않게 메모리 대역폭과 에너지가 AI의 병목으로 떠오른 것이다. HBM 확보가 빅테크 최고경영진의 어젠다가 되고, 데이터센터의 전력 계약이 모델 경쟁만큼 뜨거운 뉴스가 되는 광경을 이곳에서는 일상으로 목격한다. 그 병목의 열쇠 하나를 쥔 나라가 한국이다. 이 열쇠는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기업들이 수십 년의 축적으로 벼려 낸 성취다. 한국은 이제 공급망의 조연이 아니라 AI 혁명의 속도를 결정하는 변수다. 남은 과제는 기업이 확보한 공급망의 우위를 국가의 지속적인 경쟁력으로 전환하는 일이며, 그것은 정부의 몫이다. 안정적인 전력망과 데이터센터 인프라, 신속하고 예측 가능한 인허가, 연구개발과 인재 양성, 국제적인 기술·통상 협력이 함께 뒷받침되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다음 승부처다. 챗GPT가 연 첫 막이 ‘말하는 AI’였다면, 이곳 최전선의 관심은 이미 질병을 조기에 찾아내는 바이오·의료 AI, 그리고 제조 현장과 로봇 속으로 들어가는 피지컬 AI, 곧 ‘일하는 AI’로 옮겨 가고 있다. 다만 이 최전선에서 갈수록 또렷해지는 교훈이 하나 있다. AI는 혼자 답을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AI는 이미 본 것을 능숙하게 흉내 내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영역—진짜 혁신은 늘 그곳에서 태어난다—으로 나가라고 하면 모른다고 하는 대신 그럴듯한 오답을 자신 있게 내놓기 때문이다. 반도체를 물리 법칙으로 미리 시뮬레이션해 설계하는 기술(업계에선 이를 TCAD라 부른다)은 여러 해 걸리던 개발 기간을 획기적으로 앞당겼다. 시뮬레이션으로 예측하고 실제로 제조하고 측정하여 그 결과를 다시 시뮬레이션에 반영하는, 이 ‘측정과 학습의 루프’처럼 AI도 물리 법칙과 실측에 붙들어 맬 때 비로소 신뢰가 생긴다. 이 차이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분야가 신약 개발이다. 임상에 들어간 후보물질의 열에 아홉은 실패하고, 그 운명의 상당 부분은 사람에게 투여되기 전 분자 단계에서 이미 정해진다. 순수 AI에 기대를 걸어 온 미국과 유럽조차 아직 뚜렷한 답을 내놓지 못했고, 미국 규제 당국은 최근 새로운 방법을 공개적으로 묻기 시작했다. 아직 어느 나라도 결승선을 넘지 못한 경주라는 뜻이다. 한국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바이오 의약품 위탁생산 능력과 반도체 인프라, 전국 단위 임상 데이터가 이미 갖춰져 있다. 비어 있는 것은 ‘발굴 엔진’ 하나뿐이며, 그 설계도는 반도체가 이미 걸어온 길 위에 있다. 미국은 최고의 모델과 연구 역량을 갖추고 있지만, 제조·의료 데이터가 기관과 기업별로 분절되어 있어 이를 대규모로 연결하고 검증하는 데 상당한 비용과 시간이 든다. 한국은 다르다. 밀집된 제조 생태계, 그리고 전 국민 건강보험이 표준화해 축적한 의료·건강검진 데이터가 있다. 특히 아프지 않아도 검진을 받는 문화 덕에 건강한 사람들의 ‘정상인 데이터’가 국가 단위로 쌓인 나라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AI에게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치려면 바로 이 데이터가 필요하다. 다만 데이터는 보유 자체만으로 경쟁력이 되지 않는다. 개인정보와 환자의 권리를 보호하면서 데이터를 안전하게 연결하고 검증·활용할 수 있는 신뢰와 거버넌스를 갖춰야 비로소 국가적 자산이 된다. 요컨대 한국의 강점은 공급망이나 데이터 하나하나가 아니라, 모델을 실제 현장과 연결해 측정하고 검증하며 개선할 수 있는 산업·데이터·제도의 기반을 함께 갖췄다는 데 있다. 정부가 독자 AI 모델 개발과 GPU 확보로 ‘AI 3대 강국’의 기반을 다졌다면, 다음 단계는 그 역량을 이 현장과 데이터에 연결해 성과로 바꾸는 일이다. 관건은 내수 시장의 크기가 아니다. AI를 가장 빨리 산업과 공공서비스에 심어 검증해 본 경험 자체가 수출 상품이 되는 시대이며, 그 경험을 개발도상국과 나누는 나라가 글로벌 AI 지도의 새 허브가 된다.

역설적이게도 요즘 실리콘밸리가 가장 자신 없어 하는 질문은 기술이 아니라 분배다. AI가 만들어낼 막대한 부를 어떻게 사회 전체의 기회로 바꿀 것인가. 기본소득 같은 실험들이 회자되지만, 이곳의 어떤 천재도 아직 설득력 있는 답을 내놓지 못했다. 이 질문에 먼저 답을 실험하는 나라가 AI 시대의 규범을 쓰게 될 것이다. AI를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의 AI’로 만들겠다는 우리 정부의 방향은, 실리콘밸리가 아직 풀지 못한 이 질문에 대한 한국식 답의 출발점이다. 전국 단위의 사회보장제도와 세계적 수준의 디지털 행정 인프라를 운영해 온 경험, 대규모 정책을 신속하게 확산시켜 온 실행 역량을 가진 한국은 그 실험을 시도할 유리한 조건을 갖췄다고, 나는 이곳에서 오히려 더 절실히 느낀다. 물론 분배의 해법은 행정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AI가 창출한 생산성의 이익을 누가 소유하고, 이를 교육·의료·고용 전환과 공공서비스에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함께 필요하다.

물론 선언은 시작일 뿐이다. 자본의 깊이, 투자 심사의 전문성,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처럼 채워 가야 할 숙제도 분명 있다. 다행히 그 숙제를 함께 풀 연결은 이미 시작됐다. 실리콘밸리의 수많은 한인 전문가들이 한국의 기업·연구기관·정부와 교류하며 두 생태계 사이의 통로를 만들어 왔다. 아직은 작은 모임과 교류에서 출발하는 움직임도 많지만, 사람과 사람, 기술과 현장을 꾸준히 잇는 노력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이번 서밋은 그 흐름에 정부가 공식적인 무게와 추진력을 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 교류를 일회성 행사가 아닌 지속 가능한 협력 구조로 제도화하는 일이다.

그날 밤 행사장을 나서며 생각했다. 한국은 더 이상 초대받은 손님이 아니라 무대를 함께 만드는 파트너다. 미국의 AI 혁명이 커질수록 한국의 역할은 더 중요해지고, 한국의 역량이 커질수록 세계 AI 생태계도 함께 자란다. AI 혁명은 어느 한 나라가 독주하는 경주가 아니라 함께 키워 가는 공동의 프로젝트이며, 한국은 그 무대에서 대체 불가능한 자리를 확보해 가고 있다. 함께 만들어 가는 혁명, 그 첫 문장이 그날 샌프란시스코에서 쓰였다. 다음 문장을 쓰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며, 나 역시 이곳 현장에서 사람과 생태계를 잇는 한 줄을 보태려 한다.

필자 소개

윤성희 - 에루디오바이오 공동창업자 겸 CTO이자 에루디오바이오코리아 공동창업자 겸 대표. 서울대 전기공학부를 졸업하고 스탠포드대에서 전기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삼성전자, 아마존을 거쳐 SK하이닉스 부사장, 가우스랩스 공동창업자 겸 글로벌 R&D 총괄을 지냈으며, 현재 실리콘밸리 비영리 AI 커뮤니티 ‘실리콘밸리 AI 넥서스’ 의장을 맡고 있으며, 서강대 방문교수와 DGIST 자문교수를 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