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hayana Buddhism -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가르침
posted: 12-Sep-2024 & updated: 10-Mar-2025
Intro
대승불교大乘佛敎(산스크리트어: महायान 마하야나)는 불교의 한 종파로 “대승大乘”은 “큰 탈것” 혹은 “큰 수례”라는 뜻으로 가르침에 의해 많은 사람들을 미혹迷惑의 세계로부터 깨달음의 세계로 실어간다는 것이다. 소승小乘이 자기 완성, 즉, 자리自利를 목표로 한 “탈것”임에 대비하여 대승大乘은 많은 사람들의 구제, 즉, 이타利他를 목적으로 하는 큰 “탈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상좌부불교 중 하나인 대중부 불교가 대승불교의 기원이다.
초기의 대승불교는 부파시대의 불교가 고타마 붓다 당시의 원시불교의 활동성 ⋅ 순수성 ⋅ 일반성을 상실하고 아비달마라고 하는 고정적 ⋅ 번쇄적 ⋅ 전문적인 훈고해석에 빠져버려 중생제도衆生濟度라는 불교 본래의 사명을 망각해 버린 것을 그 본래의 자세로 되돌리기 위해서 일으킨 불교부흥운동이다. 이 운동의 발생과 그 추진역推進役에 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체로 서력 기원전 1세기경부터 재가在家를 중심으로 한 혹은 불탑佛塔을 수호하고 있던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그 지역도 남인도에 원형原型이 생겨서 북인도에서 확립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실천의 뒷받침이 되는 반야경般若經 ⋅ 법화경法華經 ⋅ 화엄경華嚴經 등의 경經이나 중론中論 ⋅ 섭대승론攝大乘論 등이 작성되었다.
소승불교小乘佛敎는 현재의 스리랑카 ⋅ 미얀마 ⋅ 태국 등에서 대승불교大乘佛敎는 중국 ⋅ 한국 ⋅ 일본 ⋅ 티베트 등에서 주로 발전했다.
My Assertion and Intention of writing this blog
여기서는 대승불교大乘佛敎 (그리고 초기불교初期佛敎)에서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들을 중식으로 대승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에 대해서 살펴 보고 실천적 행동 지침에 대해서도 논의를 함으로서 우리가 진정한 행복으로 가기 위해 해야하는 수행修行 ⋅ 정진精進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어떤 가르침과 이치를 깨달아야 하는지에 대해 논한다.
구성은 - 나름 간단하게 - 크게 네 가지로 되어 있다.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 뿐이 아니라 부처님 시절 초기불교初期佛敎에서도 핵심이 내용이 되는 연기법緣起法에 대해 특히 12연기緣起에 대해 설명한다. 또 마찬가지로 중요한 개념임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四聖諦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이 둘은 우리들이 어떤 원인과 인과관계因果關係에 의하여 고통을 받으며 그 해결책이 무엇인가를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또 삼법인三法印에 대해서도 비교적 간단하게 설명한다. 이 삼법인은 그야말로 세개의 법에 대한 도장이란 뜻으로 세 가지만 깨닫고 실천하면 고통에서 벗어나 피안彼岸의 세계로 갈 수 있다고 즉 해탈解脫과 열반涅槃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팔정도八正道로서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깨달으면서 가져야 하는 여덟가지 자세 혹은 실천사항實踐事項에 대해 말한다.
명심해야 할 것은 여기서 논하는 것은 피안彼岸과 해탈解脫에 이르기 위한 필요조건必要條件이지 충분조건充分條件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 나는 확신하건데, 아니 이것은 내 확신과 관계없는 FACT이다. 즉, 내가 확신하지 않더라도 hold하는 FACT. 여기서 진리眞理라는 단어는 내가 전달하려는 뜻을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쓰지 않는다. -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가르침이다. - 즉 깨달음으로 가는 필요조건이다. - 즉, 그 가르침에 가기 위해서는 필요조건인 연기緣起 혹은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이해가 필수이다.
그런데 여기선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명상冥想 등을 통해 얻게 되거나 - 혹은 될 수도 있는 - 특별한 경험을 깨달음이나 해탈 혹은 열반에 이르는 길이라고 혹은 이르렀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 경험은 예를 들어 몸이 떠오르는 느낌일 수도 있고 유체이탈遺體離脫의 경험일 수도 있다. 여기서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경험을 하곤 한다. 그런데 그러한 수행의 과정 중 이러한 경험을 하는 것은 실로 신비한 것이 아니다. 과학적으로 설명도 가능하다.
이렇게 수행修行 ⋅ 명상冥想 ⋅ 정진精進 등을 통해서 특별한 경험을 하는 것은 순간적으로는 기분이 좋고 평안을 얻을 수는 있으나, 그 곳에서 벗어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듯 진정한 깨달음과는 거리가 아주 멀거나 어떤 의미에서는 아예 관계가 없다. 물론 그러한 수행修行을 통해서 일시적으로 혹은 표면적으로 삶이 행복해진다면 그 나름대로 (아주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본인의 행복과 가족 주위사람들의 행복을 도모한다는 의미에서 사회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큰 기여를 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이라거나 무엇보다 바로 당신이 그토록 찾아해메고 있는 그 행복의 지점인 진정한 해탈解脫과 열반涅槃에 이르는 길이 절대로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요컨데 이것은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다.
다시 원래의 얘기로 돌아가자. 위에서 연기緣起 혹은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이해는 필수임을 즉 해탈로 가기 위해 필요조건임을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충분조건은 아니다. 즉 이론을 안다고 피안彼岸에 이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피안彼岸에 이르는 수행 방법은 하나로 정해진 것은 아니다. 본인은 간화선看話禪도 조사선祖師禪도 아닌 본인만의 특별한 방법으로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는데 사람마다 그 방법이 다를 것이고 또 봐야 하는 - 혹은 도움이 되는 - 책이나 들어야 하는 가르침, 혹은/그리고 그 깨달음에 이르는데 도움이 되는 스승, 선지식善知識 등도 다 다를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혹은 다른데서도 그것을 하나의 이론으로 혹은 한가지 설명으로 다루는 것은 불가능 하고 부처님을 포함한 어떤 사람도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해당하는 길을 제시할 수는 없다. 부처님도 35세에 깨달음을 얻고 80세에 돌아가실때까지 45년 동안 8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다 채우는 설법을 그리 많이 하신 이유도 사람마다 근기根器가 다 달라 사람마다 깨닫는 방법이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평생을 해야 하는 끊임없는 노력과 수행修行 ⋅ 정진精進이 내가 얘기한 또하나의 필요조건이다. 그 두개의 필요조건이 채워지면 (그리고 운이 좋다면) 비로소 해탈解脫 ⋅ 피안彼岸 ⋅ 열반涅槃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떠한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은 이미 그 곳에 가 있는 샘이다. 우리 모두가 불성을 갖고 있다고 할 때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방금 말한 이 모순 되는 내용은 지금 모순이라는 데서 알 수 있지만 …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렵다 / 쉽다의 단순한 말로 표현 할수 없을 정도로 어렵고 따라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고 즉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람의 언어로 verbal로 표현할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모든 이가 지니고 있는 역량이기도 하다.
이제 여기서 그 유명한 돈오점수頓悟漸修와 돈오돈수頓悟頓修의 논쟁이 있을 수 있다. 성철性徹스님이 보조국사 지눌이 말한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주장을 내치고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함으로써 시작된 이 논쟁은 아직도 계속 되고 있다. 그러나 그 둘은 결코 다르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논쟁은 완전히 무의미한 것이고 사람들의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일 뿐이다. 나의 주장이자 FACT이다.
성철性徹스님이 그런 주장을 펴는 것을 이해한다. 하지만 아무런 노력이 없이 돈오돈수에 이를 수 있겠는가? 돈오돈수를 얻는 사람은 대부분의 사람과 달리 근기가 뛰어난 것에 더해 그 전에 했던 수행 ⋅ 정진이 있었기 때문에 돈오頓悟와 돈수頓修를 한꺼번에 얻는 것이다. 돈오점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근기가 돈오돈수를 얻은 사람들보다 조금 부족하거나 아니면 그 전에 노력을 조금 들했거나 했던 사람들이다. 돈오돈수頓悟頓修든 돈오점수頓悟漸修든 깨달음을 얻는 후에도 평생 - 죽을 때까지 - 수행 ⋅ 정진에 게으르지 말아야 하는 것은 똑같다.
나는 성철스님을 비롯한 그 많은 선사先師들이 왜 이걸 몰랐고 모르는 지 이해가 안간다. 혹자는 “돈오돈수면 어떻고 돈오점수면 어떠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말이다. 여기서 혹자는 지금 여기서 내가 주장하는 것과 방금 전의 이말을 똑같은 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렇지 않다. 나의 주장을 따라서 FACT를 다른 말로 다시 말한다면 "돈오돈수나 돈오점수나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서 지나가는 과정이고 사람에 따라 다른 경험을 하는 것이지 어느 한 쪽이 맞다는 주장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어쩌면 이 논쟁에 휘말린 성철性徹스님을 비롯한 선대조사들은 같은 말을 하면서도 언어의 한계 때문에 서로 오해를 하고 논쟁을 했고 계속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내가 대승불교 가르침에 대해 이 blog(와 몇가지 경전과 과거 조사들의 글에 대한 blog)를 쓴 이유에 대해 얘기하겠다.
첫번째는 앞에서 얘기한 그 두개의 필요조건이 채워지면 비로소 (운이 좋다면) 해탈解脫 ⋅ 피안彼岸 ⋅ 열반涅槃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함이다.
두번째는 앞에서 말한 깨달음, 돈오점수頓悟漸修, 돈오돈수頓悟頓修 등에 도움이 되는 몇가지 방편方便의 하나로 경전을 읽거나 공부하거나 혹은 훌륭하신 깨달음 스님들이 쓴 글을 참고할 수 있는데 그것의 일환으로 본本 blog와 다른 blog를 통해 대승불교 경전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經(금강경金剛經),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반야심경般若心經)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스님이 쓰신 수심결修心訣, 그리고 의상대사義湘大士가 쓰신 법성계法性偈를 간단한 설명과 함께 적어 놓았음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본本 blog과 함께 다른 글들도 여러분이 삵의 고통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화를 찾고 윤회輪廻에서 벗어나 피안彼岸에 이르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그러나 무엇도 한순간에 이루어 질 수 없고 끊임없는 노력과 수행修行 ⋅ 정진精進으로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돈오돈수頓悟頓修든 돈오점수頓悟漸修든 간에 …
삼법인
삼법인三法印(tilakkhaṇa, Three Dharma Seals)은 불교의 교의를 요약하여 제시한 기치 또는 슬로건으로 불교佛敎의 기본적 입장을 특징적으로 보여 주는 근본불교 시대에 발생한 교의이다. 여기서 팔리어의 ti는 3을 lakkhaṇa는 특징을 뜻하는 말로써 <3가지 특징>이라고 직역되며 일반적으로 <3법인>이라고 부른다. 법인法印이란 법의 도장이라는 뜻으로 “이것이 찍혀있으면 진짜이고 이것이 찍혀있지 않으면 가짜이다”라고 말해질 정도로 불교佛敎의 진眞 ⋅ 위僞를 판별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불교는 수승殊勝한 이해와 미흡未洽한 이해의 차별은 있어도 삼법인三法印이라는 확고한 법인이 있었기 때문에 매우 포용적인 발전상을 축적해 왔다.3
삼법인 또는 사법인
4법인이란 다음 네가지를 말한다.
- 제행무상諸行無常
- 일체개고一切皆苦
- 제법무아諸法無我
- 열반적정涅槃寂靜
보통 3법인이라 하면 1, 3, 4를 의미하지만 남방상좌부불교에서는 1, 2, 3을 불교의 특상이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은 우주의 모든 사물은 늘 돌고 변하여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아니함을 일컫는 말이고 일체개고一切皆苦는 사람이 무상無常함과 무아無我를 깨닫지 못하고 영생에 집착하여 온갖 고통에 빠져 있음을 이르는 말이고 제법무아諸法無我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인연으로 생겼으며 변하지 않는 참다운 자아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고 열반적정涅槃寂靜은 열반의 경지는 고요하고 청정하며 안정安定한 곳이라는 뜻으로 이르는 말이다.

사성제
사성제四聖諦(산스크리트어: चतुरार्यसत्यानि catvāri āryasatyāni, 영어: Four Noble Truths) 또는 사제四諦는 <아함경(阿含經)>에 나오는 원시 불교 가르침으로 불교 기본 교의 가운데 하나이다. “제諦(Satya)”는 진리 또는 깨우침을 뜻한다. 사성제는 영원永遠히 변變하지 않는 네 가지 성聖스러운 진리, 네 가지 높은 깨우침(Ārya: 높은, Satya: 깨우침) 또는 4가지 고귀한 진리(Four Noble Truths)라는 뜻인데 고제苦諦 ⋅ 집제集諦 ⋅ 멸제滅諦 ⋅ 도제道諦의 4가지 진리 또는 깨우침을 의미한다. 흔히 이 네 가지를 간단히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부른다.
고집멸도苦集滅道는 집集과 고苦라는 연기緣起하는 항목과 道도와 멸滅이라는 연기緣起하는 항목을 합하여 나란히 늘어놨다. 여기에서 집集은 고苦의 원인 또는 인연이 되며 도道는 멸滅의 원인 또는 인연이 된다. 고집멸도는 고통의 원인이 집착 또는 갈애이며 고통을 소멸시키는 원인 또는 수단이 도라는 연기관계를 밝힌 것이다.
한편, 고타마 붓다는 “우주는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들인 십사무기十事無記는 사성제四聖諦와는 달리 지혜(智) ⋅ 깨달음(覺) ⋅ 열반涅槃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르치거나 배울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고성제苦聖諦 - Dukkha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이다.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근심, 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도 괴로움이다. 싫어하는 대상들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다. 좋아하는 대상들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데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 자체가 괴로움이다.
- 초기불전연구원, 상윳따니까야 6권,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S56:11)
사성제의 첫째는 태어나는 것,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 싫어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 등을 포함하여 존재한다는 것은 괴로움이라는 고성제苦聖諦이다.
원어 Dukkha는 산스크리트어로 직역했을 때 ‘맞닥뜨리기 힘든것’ 혹은 ‘마주하기 버거운 것’을 뜻하며 이는 강렬한 고통에서부터 만성적인 불만족감들까지 다양한 고된 경험을 넓게 포괄하는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명백하게 고통을 안겨주는 요소들뿐만 아니라 대개 즐거움이라고 생각하는 각종 쾌락 또한 괴로움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 또한 괴로움의 범주에 속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쁨’이라 생각하는 것 조차 괴로움의 카테고리에 넣는 이유는 매우 단순한데 그것이 영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 가운데에서 누리게 되는 즐거움은 반드시 끝나거나 빼앗기기 마련이며 이것이 끝났을 때 우리는 큰 상실과 슬픔, 집착에 빠지게 되므로 이러한 것들의 실체를 결코 ‘열반涅槃’의 속성에 넣을 수 없다는 이치다.
따라서 삶은 그 자체로 희노애락喜怒哀樂의 모든 요소가 괴로움에 속한다. 이를 표현한 말이 생즉고生卽苦이다. 이 불편한 진실을 용기있게 마주하지 못하면 자신이 세상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평온해지기 위해 무엇을 관찰해야하는지, 그 대상 조차 제대로 특정짓지 못하는 상태에 머물게 되므로 해탈解脫을 향한 여정의 첫 걸음부터 큰 장애에 부딪히게 된다.

괴로움은 다음 팔고八苦의 8가지로 분류하여 세부적으로 설명한다.
- 생고生苦 - 세상에 몸을 받아 태어나거나 존재를 시작하여야 하는 데에서 오는 괴로움
- 노고老苦 - 세월에 따라 늙거나 낡게 되는 것에서 오는 괴로움
- 병고病苦 - 병들거나 고장나는 것에서 오는 괴로움
- 사고死苦 - 죽어 사라지는 괴로움 혹은 이렇게 되는 것을 두려워함에서 오는 괴로움
- 애별리고愛別離苦 - 사랑하고 애욕愛慾하는 것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
- 원증회고怨憎會苦 -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과 함께해야 하는 괴로움
- 구부득고求不得苦 - 탐探하여 구하여도 원하는 만큼 얻지 못하데서 오는 괴로움
- 오음성고五陰盛苦 -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의 오음五陰에 집착함으로써 생기는 괴로움 - 오취온고五取蘊苦 또는 오성음고五盛陰苦라고도 한다.
집성제集聖諦 - Samudaya
둘째는 그 괴로움에는 원인이 있다(괴로움의 원인에 관한 진리)는 것으로 괴로움의 원인은 한가지로 요악되니 무명無明, 즉 ‘알지 못함’ 혹은 ‘어리석음’이다. 무엇을 알지 못한다는 것인가? 괴로움이 집착執着과 갈애渴愛에서 비롯됨을 알지 못하며 집착의 대상과 집착 자체와 집착하는 주체가 모두 십이연기十二緣起로 조건지어져 찰나생찰나멸刹那生刹那滅함을 알지 못한다. 괴로움이 어디서 오고 어떻게 유지되며 어디로 향하는지, 그 원리와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괴로움의 원인은 12가지 상호의존적인 단계인 십이연기十二緣起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12연기의 설명에서 무명無明, 잠재적 형성력(行), 식별작용(識), 정신과 물질(名色), 눈 · 귀 · 코 · 혀 · 몸 · 마음 등의 6가지 감각기관(六處), 접(觸), 느끼어 받아들이는 작용(受), 갈애(愛), 집착(取), 생존(有), 태어나는 것(生), 늙고 죽는 것(老死) 등의 12가지 요소가 어떻게 반복 순환하는지를 다룬다. 이 12연기의 순환과정이 곧 불교佛敎가 말하는 ‘윤회輪廻’이다. 이 순환과정을 끊는 사람은 윤회輪廻로부터 해탈解脫하여 괴로움이 그치게 된다.
멸성제滅聖諦 - Nirodha
셋째는 괴로움은 멸할 수 있으며 괴로움을 없앤 상태가 열반涅槃이라고 하는 멸성제滅聖諦이다. 괴로움의 원인은 ‘무명無明’, 즉 알지못함이니, 알면 괴로움을 없앨 수 있다. 이 멸성제의 원리를 가장 수려하게 설명한 경전이 바로 그 유명한 반야심경般若心經이다.

도성제道聖諦 - Marga
넷째는 괴로움을 멸하기 위한 8가지의 바른 수행방법, 즉 팔정도八正道가 있다는 도성제道聖諦이다. 괴로움의 멸함을 설명한 후 도성제가 등장함은 곧 괴로움을 멸하는 깨달음(앎)이라는 것이 결코 ‘머리로 깨치는 이론’이 아니며, 평생을 수행해 나가는 팔정도八正道 그 자체라는 것을 가리킨다. 즉, 깨달음(열반涅槃)으로 가는 길은 없으며, 길이 곧 깨달음(열반涅槃)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팔정도
8정도八正道(산스크리트어: āryāṣṭāṅgamārga, 팔리어: pa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영어: Noble Eightfold Path), 8성도八聖道 또는 8지성도八支聖道는 사성제四聖諦 가운데 마지막의 도성제道聖諦에서 가르치는 깨달음(멸성제滅聖諦)을 성취하는 원인이 되는 “여덟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길, 수단 또는 실천 덕목”이다.
8정도의 반대를 8사八邪 또는 8사행八邪行이라 한다. 8정도를 청정한 수행修行 또는 실천實踐이라는 뜻에서 범행梵行이라고도 한다. 8정도를 구하는 것을 범행구梵行求라고 한다.1

정도의 여덟 구성요소 또는 여덟 개의 길은 다음과 같다.
- 빤나(지혜)
- 정견正見(Samma-ditthi; right view) - 올바른 시각 · 견해 · 입장
- 정사유正思惟 · 정사正思(Samma-sankappa; right thought) - 올바른 의도 · 생각
- 시라(윤리)
- 정어正語(Samma-vaca; right speech) - 올바른 말
- 정업正業(Samma-kammanta; right action) - 올바른 행위
- 정명正命(Samma-ajiva; right livelihood) - 올바른 생활 · 생계
- 사마디(집중)
- 정정진正精進 · 정근正勤(Samma-vayama; right effort) - 올바른 수고로움 · 노력
- 정념正念(Samma-sati; right mindfulness) - 올바른 알아차림
- 정정正定(Samma-samadhi; right concentration) - 올바른 집중
연기법
연기緣起라는 단어는 산스크리트어 프라티트야 삼무파다(प्रतीत्यसमुत्पाद pratītyasamutpāda)를 뜻에 따라 번역한 것으로 인연생기因緣生起(인과 연에 의지하여 생겨남, 인연따라 생겨남)의 준말이다. 한역漢譯 경전에서는 발랄저제야삼모파다鉢剌底帝夜參牟播陀로 음차하여 표기한 경우도 있다.2
연기법緣起法이란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줄임말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存는 구조적으로 상호 의존 관계, 상의 상관관계 아래에서 생성生成, 소멸消滅, 존재存在한다는 이론理論이다. 붓다가 깨달은 진리眞理 가운데 하나로서 삼법인三法印, 사성제四聖諦 등과 함께 불교교리佛敎敎理의 핵심이다.
붓다는 깨달음을 성취한 후 21일 동안 일체 존재의 구조에 대하여 관찰했다. 그 결과 모든 존재는 독자적,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반드시 서로 협력 하에서만 성립,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는 것. 그와 함께 “이것이 없어지면 결국 저것도 없어지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고타마 붓다는 <잡아함경> 제12권 제299경 <연기법경緣起法經>에서 연기법은 자신이나 다른 깨달은 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며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고 출현하지 않음에 관계없이 우주(법계)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보편 법칙, 즉 우주적인 법칙이며 자신은 단지 이 우주적인 법칙을 완전히 깨달은(等正覺) 후에 그것을 세상 사람들을 위해 12연기설의 형태로 세상에 드러낸 것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붓다의 발견과 같이 상호 의존성을 떠나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 어느 것도 고유한 실체는 없다. 한편 연기론이 갖는 의미는 영원불변의 실체는 없으므로(無我) 애착하지 말라는 뜻이다. ‘무아無我’ ‘공空’과 동의어.

십이연기설
십이연기十二緣起(paîṭcca-samuppāda)란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를 뜻한다.
<잡아함경> 299경에는 다음과 같이 12연기를 설명하고 있다.
연기법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무명無明을 인연하여 행行이 있고, 행을 인연하여 식識이 있으며, 식을 인연하여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을 인연하여 육입六入이 있고, 육입을 인연하여 촉觸이 있고, 촉을 인연하여 수受가 있고, 수를 인연하여 애愛가 있고, 애를 인연하여 취取가 있고, 취를 인연하여 유有가 있고, 유를 인연하여 생生이 있으며, 생을 인연하여 노병사와 우비고뇌(늙음, 병, 죽음과 근심, 걱정, 고통, 번민)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법에 의해 무명이 있으므로 행이 있고, 행이 있으므로 식이 있고, 식이 있으므로 명색이 있으며, 명색이 있으므로 육입이, 육입이 있으므로 촉이, 촉이 있으므로 수가, 수가 있으므로 애가, 애가 있으므로 취가, 취가 있으므로 유가, 유가 있으므로 생이, 생이 있으므로 노병사라는 모든 괴로움이 연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십이연기는 괴로움의 원인을 밝혀내는 순차적인 작업이기도 하지만, 사실 하나하나의 지분 모두가 결국 독립적으로 괴로움을 발생시키는 조건이 되고 있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십이연기의 어느 한 지분을 소멸하게 된다면 연이어 다음 지분이 소멸되고 결국 노병사의 근원적인 괴로움은 소멸되게 될 것이다.
무명無明
무명無明(산스크리트어: अविद्या avidyā, 팔리어: avijjā, 영어: ignorance)은 글자 그대로 ‘명明이 없다’는 말로, 그 의미는 각 경전마다의 해석이 조금씩 다르다. 일반적으로 진리에 대한 무지를 가리키며, <잡아함경> 490경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무지로 이해되고 있다.
진리에 대한 무지란 연기법緣起法에 대한 무지로써, 이 세상은 모두 연기되어진 존재이며, 그 모든 것들은 무상하고 무아이므로 고정된 자성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을 의미한다. 인연 따라 연기적으로 만들어졌을 뿐 실재하지 않는 무상한 일시적 존재에 대해 실재한다고 여기고 계속될 것으로 여겨 거기에 얽매여 집착하는 상태가 바로 무지無知요 무명無明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명의 타파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무명을 타파하여 명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불교의 핵심이다. 그러한 지혜가 바로 대승불교의 반야지혜다. 이처럼 무명은 타파해야 할 대상이며, 소멸시켜야 할 것이다. 무명이 소멸될 때 결국 모든 괴로움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보통 어리석은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여기기 쉽지만, 사실 가장 큰 죄업은 어리석음에서 생겨난다.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짓고, 모르기 때문에 악행을 악행인 줄 모르고 하며, 모르기 때문에 이 세상이 진짜인 것으로 착각하여 끊임없이 돈이며 명예, 권력, 지위, 재산 등을 끌어 모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이치를 분명하게 안다면 우리의 삶의 방식은 완전히 뒤바뀌게 될 것이다.
모르기 때문에 짓는 죄업, 그것이 바로 다음에 등장하는 행行이다. 무위행無爲行이 아닌 유위행有爲行은 모두가 모르기 때문에 짓는 업행業行이며, 선행善行도 악행惡行도 근원에서는 모두가 유위행으로써 업을 늘리는 무지無知의 행이 아닐 수 없다.
행行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해서 행行이 있다.
행行(산스크리트어: संस्कार saṃskāra, 팔리어: saṅkhāra, 영어: (mental) formations)은 행위, 즉 업業을 가리키는 것으로, 삶을 향한 맹목적인 동기와 욕구를 형성한다. 쉽게 말하면 무명에 의해 실체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겨 집착된 대상을 실재화하려는 의지작용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행은 ‘유위有爲로 조작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다시 말해 무명으로 인해 무상과 무아를 모른 채 ‘나의 소유, 나의 존재, 나의 자아’라는 동일시를 일으켜 실체시 함으로써 유위로 조작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무명이 조건 되지 않았다면 유위로 조작하지 않았을 것이나 무명을 일으켰기 때문에 유위로 조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위라는 것은 말 그대로 함이 있다는 의미로 조작, 작의를 일으킴으로써 본래의 무위적이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벗어났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어리석은 무명을 원인으로 하여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무위의 삶에서 벗어나 억지로 조작하는 유위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무명에 의해 ‘나’와 ‘세상’을 실체시 하여 집착하고, 그 집착하는 대상들을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의지, 의도를 일으켜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행위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행行은 업행業行 즉, 유위행有爲行이다. 어리석은 마음, 무명에서 일어난 행위는 모두가 유위행이다. 반면에 밝음, 명明, 지혜에서 일어난 행위는 해도 한 바가 없어 흔적이 남지 않는 무위행無爲行이다. 우리는 무명, 즉 어리석기 때문에 유위행을 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유위행이다. 행위에 집착이 개입되어 있는 행위가 바로 유위행이다. 해도 한 바가 없이, 집착하지 않고 하는 행이 아닌 무언가를 조작해 내려 하고, 만들어내려 하고, 함이 있는 행인 것이다. 이와 같이 어리석음이 있으면 우리는 어리석은 행을 하게 된다. 즉, 무명無明이 있으면 행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행行을 소멸함으로써 모든 괴로움이 소멸됨을 설하고 있다. 이 말이 모든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행위를 하되 함이 없이 한다, 집착 없이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행을 소멸하게 되면, 모든 유위행이 무위행으로 바뀌기 때문에 해도 한 바가 없고, 흔적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행이다.
이처럼 불교에서 업장소멸과 무위행의 중요성을 설하는 이유가 바로, 행의 소멸이 곧 모든 괴로움의 소멸로 이어지기 때문인 것이다
식識
행行을 조건으로 해서 식識이 있다.
식識(산스크리트어: विज्ञान vijñāna, 팔리어: viññāṇa, 영어: consciousness)은 인식작용으로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여섯 가지 식(六識)이 있다. 이는 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제각각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감하고, 생각하는 것에 따라 인식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과거에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본 경험, 행行위로 인해 지금 그 음식을 보면 그 음식에 대한 각종의 분별分別과 인식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푹 삭힌 홍어를 어릴 적에 처음 먹어 본 사람이 아주 안 좋은 인식을 가졌고, 삭힌 홍어에 대한 좋지 않은 분별심分別心을 일으킨 경험이 있었다면 어른이 되어서도 삭힌 홍어를 보면 자동적으로 그 음식에 대한 나쁜 분별심分別心이 생겨날 것이다. 즉 어릴 적에 보고, 먹고, 냄새 맡고, 그에 대해 생각했던 각각의 안식, 비식, 설식, 의식들이 잠재의식으로 남았다가 인연 따라 다시 올라오게 되는 것이다. 만약 먹기 싫은 분별심分別心이 일어났지만 꾹 참고 먹었더니 신기하게도 맛이 있었다면, 이 사람에게는 식의 증장이 일어난 것이다. 의식이 새로운 경험과 행위를 통해 증장하고 변화된 것이다. 이처럼 행을 조건으로 식이 일어나고, 그 식은 다시 새로운 행에 의해 증장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식識은 왜 소멸되어야 하는 것일까? 분명 십이연기는 각각의 지분을 소멸시킴으로써 괴로움을 소멸하는 가르침이다. 식은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분별分別하여 자기 식대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인식이다. 말 그대로 분별심分別心인 것이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 방식대로 분별分別해서 보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시작된다.
식의 소멸은 곧 분별심分別心을 무분별심無分別心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대상을 우리는 늘 분별해서 인식하지만, 분별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은 채로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과거의 행行을 떠올림으로써 나쁜 사람으로 인식認識하거나 좋은 사람으로 인식하곤 하지만, 깨어있는 지혜로운 이라면 과거의 행위는 이미 지나간 과거이므로 내려놓은 채 지금 이 순간에는 좋거나 나쁜 사람이 아닌 그저 텅 빈 한 사람으로 인식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분별심無分別心이다.

그래서 중국 선의 3조 승찬대사는 <신심명>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던 것이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 至道無難
오직 간택하지 않으면 되니 - 唯嫌揀擇
미워하고 좋아하지만 않으면 - 但莫憎愛
통연히 명백해지리라 - 洞然明白
명색名色
식識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名色이 있다.
명색名色(산스크리트어: nāmarūpa, 팔리어: nāmarūpa, 영어: name and form)은 명名과 색色을 말하는 것으로 명名은 정신적인 작용을 색色은 물질적인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명은 ‘이름’이고 색은 ‘모양’인데 정신적인 것들은 형체와 모양이 없기 때문에 이름으로 보통 불리우고 물질적인 것들은 모양과 형태가 있기 때문에 색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명색은 식識의 대상이다. 인식認識과 분별分別의 대상이 바로 명색이다. 우리는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들을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은 정신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이름을 붙여 인식하고 물질적인 것들은 모양과 형태로 인식을 한다.
그런데 명색은 이름과 모양을 지닌 단순한 의식의 대상인 것이 아니라 모든 대상을 이름과 모양을 지닌 존재로 인식하는 의식상태를 말한다는 점이다. 어떤 식이 있느냐에 따라 어떤 대상을 볼 것인가가 결정된다. 식識에 따라 명색名色이 결정되는 것이다. 자기 안에 어떤 업식이 있느냐에 따라 똑같은 여행지를 가더라도 똑같은 곳에 살더라도 자신에게 보이는 것은 저마다 다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명색을 단순한 의식의 대상이라고 한다면 실체적으로 식이 있고 식의 대상인 명색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식도 인연 따라 만들어진 비실체적인 것이며 그렇기에 소멸되어야 할 것이고, 그 식의 대상인 명색 또한 실체적인 이름과 실체적인 모양을 지난 어떤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서 그런 이름과 모양을 지닌 존재로 인식하게 된 의식상태인 것이다. 만약에 명색이 인식의 대상이라면 명색은 소멸시켜야 할 대상이므로 이름과 모양을 가진 모든 것을 소멸시켜 없애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목적이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 모든 존재들을 다 소멸시켜 없애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상대방으로 인해 괴롭다고 해서 상대방을 없애 버리거나, 눈 앞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은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근원적인 방법이 될 수 없다. 나에게 괴로움을 주는 대상 즉 명색名色이 있다고 그 대상 자체를 없애거나 소멸시키는 것은 근원적인 방법이 아닌 까닭이다.
따라서 명색을 멸滅해야 한다. 내 안에 명색으로 자리 잡고 있는 모든 대상들이 실체가 아닌 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실체라고 생각하면 그러한 실체적인 대상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다. 돈이나 아파트나 자동차라는 명색을 실체라고 생각하면 더 많은 돈, 더 좋은 아파트, 더 좋은 자동차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명색이 비실체적이며 무상하고 무아인줄 안다면 그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실체화시키지 않으면 저절로 집착執着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잡아함경> 298경에 따르면 구체적으로 명은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을 말하며 색은 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의 사대四大와 사대로 이루어진 물질을 말한다. 즉 오온五蘊을 물질과 정신으로 나누어 놓은 것이다. 여기에서는 다음에 나올 육입六入이라는 주관적 감각기관의 객관적 대상인 육경六境을 지목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오온五蘊을 명색名色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육경六境 또한 명색名色이기 때문이다.
육입六入
명색名色을 조건으로 해서 육입六入이 있다.
육입六入(산스크리트어: ṣaḍāyatana, 팔리어: saḷāyatana, 영어: six sense gates, six sense bases)은 6처六處, 6입처六入處, 내6입內六入, 내6입처內六入處, 6내입처六內入處, 6정六情, 제입諸入, 6촉입처六觸入處, 6촉처六觸處, 6갱락처六更樂處 또는 6근六根이라고도 한다. 육내입처는 인연 따라 생겨난 감각기능과 감각활동을 보고 ‘나我’라고 여기는 잘못된 착각을 말한다. 육입에는 안입眼入, 이입耳入, 비입鼻入, 설입舌入, 신입身入, 의입意入이 있다. 즉 눈, 귀, 코, 혀, 몸, 뜻이라는 여섯 가지 주관적 감각기관, 감각기능, 감각활동을 보고 ‘나我’라고 여기는 허망한 의식이다.
명색이 생기고 나면 명색이라는 대상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뜻으로 생각하면서 그러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감을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곧 ‘나我’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명색을 감각하는 존재를 나我라고 착각하는 의식이 바로 육입六入이다.
허망하게 인연 따라 존재하는 명색을 실제 있는 것으로 여기고 그 대상을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하다 보니 그 감각하는 나我라는 존재가 있다고 착각하는 육입이 생기는 것이다.
당연히 이 육입은 멸滅해야 할 것이다. 육입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는 감각기관과 감각활동을 보고 나我라고 착각하는 허망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육입을 멸滅한다는 것은 곧 나我라는 허망한 착각을 멸滅하는 것으로 이는 곧 무아無我를 깨닫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한 이는 육입이 사실은 인연 따라 생겨난 것임을 자각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비실체적인 것임을 아는 것이다. 텅空 비어 공하지만 공空한데 치우치지 않고 육입六入이 실제 있다는데에도 치우치지 않음으로써 육근六根이라는 감각기능을 활용하여 잘 쓰면서도 그것이 텅 비어 실체가 없음을 알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육입六入이라는 허망한 착각 아상我相을 소멸시킨다는 것이 곧 여섯 가지 감각기능이 마비되어 쓰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사라진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여서 가지 감각기능과 활동을 보고 나我라고 착각하지만 않을 뿐, 우리는 여전히 여섯 가지 감각기능을 잘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육근청정六根淸淨이다. 육입처六入處는 소멸하였지만 육근은 청정하게 수호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십이연기十二緣起를 깨달았기 때문에 육입은 소멸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근은 청정하게 유지되는 것이다. 육근이 청정해지면, 눈으로 무엇을 보든 귀로 무엇을 듣든 코로 어떤 냄새를 맡든 혀로 어떤 것을 맛보든 그 대상에 휘둘리지 않고 사로잡히지 않는다.

촉觸
육입六入을 조건으로 해서 촉觸이 있다.
촉觸(산스크리트어: sparśa, 팔리어: phassa, 영어: contact)은 6입연촉六入緣觸과 촉연수觸緣受의 연기관계에서 한 지분을 이루고 있는데, 6입연촉은 연6입촉緣六入觸이라고도 하며 촉연수는 연촉수緣觸受라고도 한다. 6입연촉 또는 연6입촉은 6입六入 즉 6처六處 즉 6근六根이 있으므로 촉觸이 있다는 뜻이고, 촉연수 또는 연촉수는 촉觸이 있으므로 수受가 있다는 뜻이며, 또한 이들은 모두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되는 것을 뜻한다.
촉觸이란 육입을 ‘나’라고 생각하면서 나에 의해 접촉되면서 지각되고 감각되는 것들이 외부에 실제로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것이다. <잡아함경> 298경에서는 촉이란 여섯가지로 눈의 접촉, 귀의 접촉, 코의 접촉, 혀의 접촉, 몸의 접촉, 뜻의 접촉이 있다고 설하고 있다. 즉 눈으로 무언가를 볼 때나 귀로 소리를 들을 때, 냄새 맡을 때나 맛볼 때, 감촉을 느낄 때나 생각할 때 의식이 함께 접촉하면서 ‘무언가가 있다는 의식’이 일어나는 것이다. 즉 촉觸이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 보고 감촉을 느낌으로써 비로소 ‘무언가가 있다’는, ‘존재한다’는 의식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촉이 단순한 접촉이 아니라, ‘무언가가 있다고 여기는 의식’이기 때문에, 경전에서는 촉을 촉입처觸入處라고 부르기도 한다. 입처入處란 십이입처十二入處에서처럼 결국에 우리가 소멸시켜야 할 허망한 의식상태를 의미한다.
이 촉입처 또한 멸해야할 허망한 의식이다. 촉을 멸한다는 것은 눈으로 대상을 보지도 않고, 의식하지도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접촉을 하지만 접촉하면서 접촉하는 무언가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허망한 착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접촉한 것은, 접촉했기 때문에 실재로 존재한다고 여긴다. 많은 사람들이 확신하는 것들은 주로,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혹은 귀로 똑똑히 들었기 때문에 그것은 사실로써 존재한다고 주장하곤 한다. 눈귀코혀몸뜻이 접촉하는 경험을 통해 그것이 실재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두 눈으로 보았다고 해서 정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을지라도 자신이 잘못 본 것일 수도 있고, 환영을 본 것일 수도 있다. 귀로 똑똑히 들었다고 할지라도 잘못 들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 보고 감촉을 느끼고 생각했다고 해서, 육입인 내가 명색인 대상을 분별하여 인식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실재로 존재한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촉 또한 허망한 의식일 뿐이며, 소멸해야 할 의식이다. 촉입처가 소멸하면 우리는 눈으로 보았다고 해서 다 있다고 착각하지 않을 것이며, 들었다고 해서 함부로 결론짓지 않을 것이다. 단지 눈으로 보았을 뿐이라고 말할 뿐 보았기 때문에 실재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수受
촉觸을 조건으로 해서 수受가 있다. 즉, 육입六入과 명색名色 그리고 식識의 삼자가 촉觸함으로써 수가 있게 된다.
수受(느낌·지각·정서·영납領納·감수感受, 산스크리트어: vedanā, 팔리어: vedanā, 영어: feeling, sensation)는 내가 대상을 접촉하여 있는 것으로 의식할 때 느낌, 감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외부에 무언가가 ‘있다’, ‘존재한다’고 느끼는 촉으로 인해 그 대상에 대해 좋거나 싫은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외부의 대상은 좋거나 나쁜 실질적인 성질을 띠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들을 좋거나 나쁘게 느낀다고 여기는 것이다.
만약에 내(육입六入)가 대상(명색名色)을 인식(식識)하였지만 ‘있다’(촉觸)고 느끼지 않았다면 좋거나 싫은 느낌(수受)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나른한 오후 의자에 앉아 깜빡 졸다가 꿈결인지 현실인지 눈앞에 어떤 환영 같은 것을 보았다고 해 보자. 내가 대상을 인식한 것이다. 육입六入이 명색名色을 인식한 것이다 그러나 곧 그것이 환영임을 안다. 깜빡 졸면서 일어난 꿈같은 환영일 뿐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면 거기에 대해 좋거나 싫은 고락의 감정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가짜이기 때문이다. 식識과 명색名色과 육입六入은 있었지만, 촉觸이 없었기 때문에 수로 넘어오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촉觸이란 식과 명색과 육입의 접촉을 통해 대상을 실제로 ‘있다’고 여기는 의식인 것이다 대상이 실재로 ‘있다’고 여길 때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해 좋거나 싫은 감정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같은 수에는 즐거운 감정인 낙수樂受, 괴로운 감정인 고수苦受,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감정인 사수捨受 혹은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가 있다.
즉 안근眼根인 눈으로 색경色境인 대상을 접촉하여 있다고 인식識함에 따라 좋은 느낌이나 싫은 느낌 혹은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여섯가지 감각기관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여섯 가지 대상을 인식하고 접촉하면 좋거나 싫거나 그저 그런 3가지 느낌이 일어난다.
여기에서부터 모든 문제는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자의 접촉은 있을지언정 좋거나 싫은 느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다음에 살펴볼 애욕이나 취착으로 이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촉을 조건으로 해서 좋거나 싫은 느낌이 있기 때문에 좋은 느낌은 더욱 취하려고 하고, 싫은 느낌에서는 멀어지려고 하기 때문에 탐욕과 성냄 등의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수는 멸해야 할 것이다. 수를 멸한다는 말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느끼되 느끼는 그 대상에 속지 않는 것이다. 느낌이 진짜가 아님을 아는 것이다. 그 느낌은 ‘촉’에서 나왔음을 알기 때문이다. 즉 어떤 대상에 대한 좋거나 싫은 느낌은 그 대상이 실재로 ‘있다’고 여겨지는 ‘촉’에서 나왔기에 일어난 감정일 뿐이다. 그것이 다만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일 뿐, 실재로 있는 것이 아닌 환영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는 거기에 좋거나 싫은 감정을 깊이 개입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즉 꿈과 같고 환영과 같으며 신기루와 같은, 무상하고 무아이며 비실체인 공한 대상에 대해 좋거나 싫은 감정을 과도하게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란 말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살펴보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십이연기에서는 수受만 언급되어 있지만, <잡아함경> 306경에서는 “촉觸에서 수상사受想思가 함께 생겨난다”라고 함으로써 수受 뿐 아니라, 상想과 사思가 함께 생겨남을 설명하고 있다. 수상사는 곧 오온五蘊의 수상행受想行이다. 결국 촉觸에서는 수受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상想과 행行도 함께 생긴다.
애愛
수受를 조건으로 해서 애愛가 있다.
애愛(산스크리트어: तण्हा tṛṣṇā, 팔리어: taṇhā, 영어: craving, desire, thirst)란 갈애渴愛로서 욕망慾望, 애욕愛慾, 탐욕貪慾을 말하는 것으로 앞서 수受에서의 좋고 싫다는 느낌이 더욱 깊어진 상태로 좋은 것은 더욱 갈망渴望 · 욕망慾望하려 하고 싫은 것은 멀리하려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마치 목마른 자가 음료수를 구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과 같이 모든 것을 욕구하여 만족을 얻고자 하는 본능적 욕심을 말하는 것이다.
수를를 조건으로 애愛가 있다고 한 바와 같이 낙수樂受인 좋은 느낌의 대상을 만나면 자연히 애착과 갈애가 생겨나고 고수苦受인 싫은 느낌의 대상을 만나면 미움과 증오를 일으키게 된다. 미움과 증오 역시 애의 일종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수와 낙수 등의 감수작용이 심해질수록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일어나는 애착심과 증오심 등의 갈애 또한 커지는 것이다.

이처럼 좋거나 싫은 대상에 대한 갈애가 커지게 됨으로써 좋은 대상은 더욱 더 갈망하고 싫은 대상은 더욱 더 증오하는 등의 중도에서 벗어난 극단적인 치우침의 어리석은 마음이 생겨난다. 여기서 갈망하는 마음을 탐심貪心 증오하는 마음을 진심嗔心 이리석은 마음을 치심癡心이라고 한다. 이 세 가지 번뇌야말로 인간이 끊어 없애야 할 근본적인 번뇌의 독인 탐진치 삼독三毒심이다.
그래서 12연기緣起의 모든 지분이 괴로움의 원인을 해명해 주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도 탐진치貪嗔癡 삼독三毒 가운데 탐심과 진심의 원인인 ‘갈애渴愛’와 치심인 ‘무명無明’ 이 두 가지를 가장 큰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마음은 12연기의 앞선 지분에서 보듯이 그 근원적인 원인은 무명無明이라는 어리석음 때문이다. 무명이 근본 원인이 되어 행行 · 식識 · 명색名色 · 육입六入 · 촉觸 · 수受라는 과정을 거쳐 좋거나 싫은 대상에 대한 애착愛着과 증오憎惡의 분별分別이 커감으로써 애욕을 키운다.
이처럼 갈애渴愛는 무명無明과 더불어 12연기 순관에서 밝히고 있는 괴로움의 원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잡아함경>913경에서도
중생衆生에게 일어나는 모든 괴로움은 모두 다 애욕愛慾이 근본이 된다. 그것은 애욕에서 생기고, 모이며, 일어나고, 애욕이 원인이며, 애욕을 인연하여 생긴다.
고 하고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사성제四聖諦를 설명할 때 괴로움의 원인인 집성제集聖諦를 ‘욕망慾望’이라고 설하고 있다. 또 사고팔고四苦八苦의 여덟 가지 괴로움이 생기는 직접적인 원인을 갈애渴愛라고 보기도 한다. 이런 점을 보더라도 욕망이 무명과 함께 인간 괴로움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애愛에는 욕계慾界의 욕망인 욕애慾愛, 색계色界의 욕망인 색애色愛, 무색계無色界의 욕망인 무색애無色愛가 있다고 한다. 중생衆生이 윤회輪廻하는 세계를 욕계慾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로 나누는데 욕계가 가장 의식이 낮은 존재가 사는 곳으로 식욕, 성욕, 수면욕 등의 감각적 욕망을 가진 중생들의 세계다.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수라를 비롯해 천상세계 중에는 욕계6천(사천왕천, 도리천忉利天, 야마천夜摩天, 도솔천兜率天, 화락천化樂天,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라고하는 낮은 하늘세계의 신들까지를 포함하는 세계다. 색계는 욕계 위의 천인들의 세계로 거친 욕망은 떠나 있으나 청정하고 미세한 색법에는 여전히 묶여 있기 때문에 색계라고 한다. 색계는 남녀의 구분이 없고 음욕淫慾도 없는 화생의 세계이며 빛을 먹고 빛을 언어로 삼는다. 무색계는 중생들의 낮은 욕망 뿐 아니라 물질 또한 초월한 세계로 물질적인 존재나 처소가 없는 선정의 세계이며 순수 정신의 세계다.
애를 욕애, 색애, 무색애로 나누는 것은 아무리 높은 천상세계에 있다고 할지라고 근본적으로는 미세한 애욕이 남아 있음을 뜻하며, 그러한 애욕이 남아 있는 이상 삼계를 윤회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애는 윤회에 있어서 그 원동력이 되며, 애욕이 남아 있는 이상 윤회는 끝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당연히 애愛 또한 소멸되어야 할 십이연기의 지분이다. 애욕이 소멸되면 곧 괴로움이 소멸된다. 수많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끊임없이 애욕과 욕망을 버리라고 설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애욕과 욕망을 소멸할 때 비로소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욕망 중에는, 죽을 때 본능적으로 나타나는 세 가지 애착심이 있다. 첫째는 자체애自體愛라 해서 자신의 몸뚱이에 대한 애착을 나타내는 것이고 둘째로 경계애境界愛라 하여 사랑하는 사람, 자식, 부모, 재산, 명예 등 내 주위 경계에 대해서 애착을 나타내는 것이며 셋째로 당생애當生愛라 하여 다음 생에 좋은 세상에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애착심이다. 죽기 직전에 이러한 애욕을 끊어내지 못함으로써 끊임없는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고 돌 수밖에 없는 것이다.

취取
애愛를 조건으로 해서 취取가 있다.
취取 (산스크리트어: upādāna, 팔리어: upādāna, 영어: attachment)는 취착取着, 집착執着, 혹은 아집我執을 의미한다. 애욕愛慾, 욕망慾望에 의해 추구된 대상을 완전히 자기화하려는 것으로 ‘내 것’으로 만들려고 붙잡아 집착하는 것이다. 애욕이 커지면서 발생하는 강렬한 애착愛着, 취착심이다.
이러한 취착에는 다시 사취四取가 있으니 그것은 욕취欲取, 견취見取, 계취戒取, 아취我取이다.
욕취欲取는 애욕의 대상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취착이다. 끊임없이 애욕의 대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아집으로 인해 더 많이 소유하려 하고 더 많이 축적하려 하는 것이다. 애욕의 대상에는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의 다섯 가지 대상과 다섯 가지 욕망인 재물욕財物欲, 성욕性慾, 음식욕飮食欲, 명예욕名譽欲, 수면욕睡眠欲 등이 있다. 이러한 욕망의 대상들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집착심執着心인 것이다.
다음은 견취見取로 이는 갖가지 잘못된 견해를 진실로 알고 자기화하여 집착하는 것이다. ‘내가 옳다’고 하는 자기 생각에 대한 집착심으로 그릇된 의견, 사상, 학설에 사로잡혀 집착하는 것이다. 편견偏見과 고정관념固定觀念에 사로잡혀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경우도 이에 속한다.
계취戒取는 계금취戒禁取라고도 하며 그러한 잘못된 견해見解나 사상思想을 바탕으로 행하는 잘못된 삶의 방식 내지는 계율戒律 등에 집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은 아취我取인데 아취는 아어취我語取라고도 하며 오온五蘊의 화합을 참다운 나라고 집착하는 견해에 집착하는 것이다. 즉 ‘나’라는 것은 다만 사대인 색온色蘊과 정신인 수온受蘊 · 상온想蘊 · 행온行蘊 · 식온識蘊 다섯 가지의 요소가 인연화합 함으로써 잠시 비실체적인 나를 이루었음을 알지 못하고 ‘나’를 실체화하여 집착하여 아집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사실 모든 인간고의 뿌리는 오취온五取蘊에 대한 잘못된 집착 즉 아취에 있다. 비실체적인 오온의 집합인 ‘나’를 실체화하는 무명을 일으킴으로써 나를 내세우고자 하고 욕취와 견취, 계취를 일으키는 것이다.
당연히 이 취取 또한 소멸되어야 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불교는 무집착無執着의 종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집착을 버리라는 가르침을 중요시 여긴다. 방하착放下着, 모든 집착을 내려 놓으라는 가르침이야말로 불법 수행의 핵심이다. 이러한 무집착, 방하착의 가르침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집착을 소멸시키는 것이야말로 12연기를 실천하여 고를 소멸하는 핵심 방법이기 때문이다.

유有
유有(산스크리트어: bhava, 팔리어: bhava, 영어: existence)란 존재存在 혹은 생존生存이다. 혹은 업業으로 이해되거나, 존재양식, 생활방식 등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욕애慾愛, 색애色愛, 무색애無色愛 등 다양한 방향의 애욕을 가지고 사는 중생들이 자신이 욕망하는 바의 애욕을 취하여 집착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러한 애욕과 집착을 중심으로 하는 존재방식으로 계속해서 업을 짓게 된다 그러한 업이 하나의 생존의 존재방식이 되어 다음 생에 어떤 업을 가지고 어떤 곳에서 태어날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유有는 욕계慾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가운데 어느 곳에 태어날 만한 업業을 지으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유有를 업業이라고도 하고 생존, 존재방식 등으로도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애愛에서 욕애慾愛, 색애色愛, 무색애無色愛가 있는 것처럼 유有에도 욕유慾有, 색유色有, 무색유無色有의 세 가지 존재가 있다. 욕애는 욕유, 욕계와 대응하고 색애는 색유, 색계와 대응하며 무색애는 무색유, 무색계와 대응한다. 즉 욕계의 애욕인 욕애가 있으면 욕계에 대응하는 감각적 욕망을 가지게 되고 그러한 욕계의 애를 취착하려는 집착심을 일으키며 그로인해 결국 욕계에 태어날 수 밖에 없는 욕계의 업인 욕유가 생겨나는 것이다. 색계와 대응하는 애욕인 색애가 있으면 색애를 취착하는 삶을 살게 되고 결국 색계에 태어날 수밖에 없는 색계의 업, 색계의 존재 방식인 색유가 연기하는 것이다. 무색유 또한 마찬가지다. 즉 욕계를 초래하는 욕유의 생존방식이 있고, 색계를 초래하는 색유의 생존방식이 있으며, 무색계를 초래하는 무색유의 생존방식이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식욕이나 성욕, 명예욕 등의 욕계의 욕망을 지니며 살아가게 되면 욕계의 감각적 욕망을 집착하고 취하는 삶을 이어가게 되고 그렇게 애와 취가 계속되면 결국 욕계에 태어날 수밖에 없는 업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욕유다. 욕계의 애욕을 취함으로써 욕계와 대응하는 삶의 방식으로 굳어지고 그러한 삶의 방식이 곧 욕계에 태어날 수밖에 없는 업들로 모임으로써 욕유가 생겨나는 것이다. 욕유는 욕계의 업들이 생겨나는 것, ‘있는 것(有)’ 정도로 해석해 볼 수도 있겠다. 욕계의 업이 있게 되면 그 욕유를 조건으로 다음 지분인 욕계의 세상에 태어나는 생生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욕慾, 색色, 무색無色이라는 나름대로의 욕망의 수준에 따라 각기 집착하는 것이 다르고 짓는 업이 다름으로써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욕, 색, 무색의 유有가 생기면 그에 따라 생生이 생겨난다.

생生
유有를 조건으로 해서 생生이 있다.
생生(산스크리트어: jāti, 팔리어: jāti, 영어: birth)이란 업業에 의해 태어남으로써 정신적 육체적 기관인 오온五蘊과 여섯 감각기관인 육근六根을 받는 것을 말한다.
유有 즉 업業이야말로 태어남이 있게 한 원인이다. 태어남이란 이상에서와 같은 12가지 조건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이다. 이렇듯 무명無明과 갈애渴愛 등의 지분을 원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 태어남 또한 완전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불완전不完全한 인간의 무명은 또다시 생명에 집착을 가져오고 되풀이 되는 무명과 행위行爲, 애욕愛慾, 집착執着 등을 가져옴으로써 끊임없는 괴로움의 윤회輪廻의 수레바퀴를 돌고 돌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생이란 오온五蘊이 생겨나는 태어남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보다 근원적으로는 태어나도 태어난 바 없는 불생불멸을 깨닫지 못한 채 어리석은 무명無明에 갇혀 이렇게 오온이 허망하게 생겨난 것을 가지고 실제 내가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허망한 마음이 바로 ‘생生’이다.
부처님의 지혜智慧에서 본다면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은 그저 허망하게 일어나고 사라진 하룻밤 꿈과 같은 일일 뿐이다. 거기에 실체적인 어떤 것은 없다. 본래 생멸生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인 것이다. 우리는 그저 매 순간 존재할 뿐이지 그 존재하는 놈을 상정해 놓고 그 존재하는 ‘나’가 태어나고 죽어간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오온무아五蘊無我에 무지한 어리석은 중생衆生들의 허망한 착각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중생衆生들에게는 생사生死가 나뉘어져 있지만 12연기를 깨달은 각자에게는 더 이상 생사生死가 따로 없다. 생生이라는 것 또한 이와 같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몸과 마음이라는 오온五蘊을 ‘나’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태어났다고 개념 짓고, 상想을 낼 뿐이지, 본래 생生이란 없다.
부처님께서는 이상에서와 같은 12연기를 깨달으심으로써 반열반般涅槃에 들어 더 이상 생을 받지 않는다. 업業이 다하게 되면 업으로 인해 태어나는 업생業生 또한 소멸消滅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 지분에서 이야기 되겠지만, 업業으로 인해 태어나면 반드시 업業의 과보果報를 받고 결국 늙고 병들고 죽게 되는 과보를 받지 않을 수 없다. 노사老死 우비고뇌憂悲苦惱의 괴로움이 연기緣起하는 것이다.

노사老死
생生을 조건으로 해서 노사老死가 있다.
<증일아함경> 46권에서는 노사老死(산스크리트어: jarā-maraṇa, 팔리어: jarā-maraṇa, 영어: aging and death, decay and death)를
늙음이란 중생의 몸에서 이가 빠지고, 머리털이 세며, 기력이 쇠하고, 감관이 녹으며, 수명이 줄어들어 본래의 정신이 없는 것이고, 죽음이란 중생들이 받은 몸의 온기가 없어지면서 덧없고 변하여 오온을 버리고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다.
라고 설하고 있다.
그런데 노사란 늙음과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노병사老病死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괴로움을 의미하는 것이다. 노병사老病死 우비고뇌憂悲苦惱 즉 늙음과 병듦, 죽음과 근심, 걱정, 고통 번민 등 인간의 모든 괴로움을 의미한다.
당연히 앞의 12연기의 각각의 지분이 소멸하게 된다면 그로인해 연기한 노사로 대표되는 괴로움 또한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짐승들의 발자국이 코끼리 발자국에 포섭되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가르침에 포섭된다. 그런 점에서 바로 이 노사라는 괴로움과 노사라는 괴로움의 소멸이야말로 십이연기의 핵심이며 나아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해서 유위의 행行이 일어나고 행行을 조건으로 해서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이 일어나며 이 세 가지가 접촉接觸(觸)함에 따라 좋고 나쁜 느낌이 수受가 일어나고 연이어 애욕愛慾(愛)과 집착執着(取)을 일으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존재存在(有)와 태어남(生), 그리고 노사老死 등의 온갖 괴로움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 12연기의 순관이다.
즉 인간의 어리석음이 바탕이 되어 유위有爲의 업인 행行이 생기고 그에 따라 인간의 몸과 마음인 육입六入이 나와 세계世界라는 대상인 명색名色을 인식하고 그 세 가지가 접촉함으로써 느낌이 생겨 애욕愛慾과 집착執着을 일으킴으로써 대상을 자기화하려는 어리석은 업을 계속 짓게 되는 것이다. 그에 따라 생生과 노사老死가 일어나는 것이다.
Appendices
육조六祖 혜능慧能스님의 오도송悟道頌
다음은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이 오조五祖 홍인弘忍스님으로부터 금강경金剛經 설법說法을 듣고 읊었다는 오도송悟道頌이다.
何期自性 本自淸淨
자성이 본래 스스로 청정하다는 사실을 제가 어떻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하기자성 본자청정
何期自性 本不生滅
자성이 본래 불생불멸이라는 사실을 제가 어떻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하기자성 본불생멸
何期自性 本自具足
자성이 본래 저절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제가 어떻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하기자성 본자구족
何期自性 本無動搖
자성이 본래 아무런 동요가 없다는 사실을 제가 어떻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하기자성 본무동요
何期自性 能生萬法
자성이 능히 일체 만법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제가 어떻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하기자성 능생만법
용수보살 중론4의 서문 中
너무나도 고귀한 세상의 진리인 연기緣起를 가르쳐 주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참마음의 동의어
선불교禪佛敎에서 말하는 “참마음”의 동의어
- 이것
- 자성自性
- 마음
- 참마음
- 참나
- 본래면목本來面目
- 열반涅槃
- 해탈解脫
- 견성見性
- 진리眞理
- 법法
- 성품
- 불안佛眼
정혜定慧의 대칭구조를 나타내는 말들
- 혜안慧眼 - 법안法眼
- 마하摩訶 - 반야般若
- 창공蒼空 - 백일白日
- 공적空寂 - 영지靈知
- 진공眞空 - 묘유妙有
- 적적寂寂 - 성성惺惺
- 선정禪定 - 지혜智慧
- 정定 - 혜慧
- 공성空性 - 각성覺性
- 살殺 - 활活
- 무심無心 - 평상심平常心
- 차 - 조
- 지 - 관
- 은隱 - 현顯
- 사마타(samatha) - 위빠사나(vipassanā)
참고 - 수심결修心訣
Reference
-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 도올 김용옥
- 사성제 @ 나무위키
- 팔정도 @ 위키백과
- 팔정도 @ 나무위키
- 십이연기 @ 목탁소리
- 연기 @ 위키백과
- 십이연기설 @ 위키백과
- twelve-linked chain of causation @ Nichiren Buddhism Library
- 불교신문
- 나가르주나 - 용수
Footnotes
- 팔리어에서 길(道)은 막고(maggo)라는 단수형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여덟 개의 길이 전체로서 하나를 이루고 있으며 또한 각각의 길은 나머지 일곱을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여덟 개의 길 가운데 어느 하나가 실천되면 다른 일곱 개의 길이 그 하나에 포함되어 동시에 행하여지는, 서로 포섭하는 관계에 있다. 이러한 취지에 따라, 팔정도의 영어 번역어도 'Noble Eightfold Path'라고 하여 길(path)을 복수가 아닌 단수로 표현하고 있으며, 여덟도 단순한 여덟(eight)이 아닌 팔중八重(eightfold)으로 표현하고 있다. ↩
- Pratītya의 사전적인 뜻은 '의존하다'이고 samutpāda의 사전적인 뜻은 '생겨나다 · 발생하다'이다. 연기緣起, 인연생기因緣生起, 즉 '프라티트야 삼무파다'는 영어권에서는 dependent arising, conditioned genesis, dependent co-arising, 또는 interdependent arising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
-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 도올 김용옥 ↩
- 중론中論은 산스크리트어 물라 마드야마카 카리카(Mūlamadhyamakakārikā)를 뜻에 따라 번역한 것으로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중도에 대한 근본적인 글(Fundamental Verses on the Middle Way)"이다. ↩